‘오로지 인식’에 대한 노래 서른줄
저자: 바수반두(वसुबन्दु, Vasubandhu, 世親, 4세기) / 역자: 이성재
목차
유식30식송
‘오로지 인식’에 대한 노래 서른줄[편집]
- 나와 세상[3] 에 대한 여러 이야기[4] 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나와 세상에 대한 우리의[5] 인식이 바뀌어 만들어진 것입니다.[6] 이런 바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7] - 무르익는 인식,[8] 헤아리는 인식, 그리고 감각 영역에 따른 인식[9] 입니다.
이 가운데에서[10] 인식이라는 집(알라야)[11] 은 모든[12] 씨앗을 여물게 합니다. - 인식의 과정에서[13] 거두어 붙잡은 것[14] 이 어디에 어떻게 머무는[15] 지 알 수는 없[16] 지만,[17]
대상에 닿아,[18] 뜻을 일으키고,[19] 거두어,[20] 떠올리고,[21] 헤아리는[22] 것과[23] 늘 함께 합니다.[24] - 느낌[25] 과 무관[26] 하며,[27] 번뇌에 덮여 있지도 않고,[28] 좋거나 나쁘지도 않으며;[29]
‘닿아 일으켜 거둬 떠올려 헤아리는 것’도[30] 이와 같아, 늘 물줄기가 터지 듯[31] 일어나며;[32][33] - 이 흐름[34] 에서 벗어나면[35] 아라한의 자리[36] 이니, 이는 인과율의 안식처[37] 입니다.
알라야식에 기대어, ‘마나’라고 하는[38] 인식이 생기며; 헤아림이 특징[39] 입니다.[40] - 나라는 어리석음과 스스로 보고 스스로 우쭐하고 스스로를 사랑한다고 하는, 이 네 가지 번뇌와 늘 함께 하고;
‘닿아 일으켜 거둬 떠올려 헤아리는 것’과도 늘 함께 하며; - 덮은 것이 있되, 기록되지 않은 것이고; 묶인 것이 생기는 곳을 따르며;
아라한(의 자리)와 그침의 상태[41] 와 세상 벗어난 길에는 없다. - 인식 변화의 세 번째는, (각각의) 감각 영역에 따라, 여섯 가지로 나뉘며;
좋거나, 좋지 않거나, 이도 저도 아니기도 하다. - 그 마음 자리는 늘 있는 것, 경우에 따라[42] 있는 것, 좋은 것;
번뇌, 그리고 번뇌를 따르는 것이며, 이 마음 자리들은 (마음이) 거두는 세 가지 결과값[43] 과 모두 서로 어울린다.[44] - 우선 ‘늘 있는 것’은 ‘닿아... 헤아리는 것’이며; 그 다음, ‘경우에 따라 있는 것’은 바래고,
이해하고, 외우고, 다스리고,[45] 슬기로운 것이며, (이들이) 나타나는 조건은 각자 다르다. - ‘좋은 것’은 믿음, 양심, 부끄러움, 탐내지 않음 등의 세 가지 뿌리[46] 와,
부지런함, 편안함, 신중함, 해코지 않음[47] 이다. - ‘번뇌’는 탐내고, 미워하고, 어리석고,[48] 오만하고, 의심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49] 이다.
‘번뇌를 따르는 것’은 화내고, 원망하고, 헐뜯고, 괴로워하고, 샘내고, 좀스럽고, - 속이고,[50] 착한 체 하고,[51] 해롭고, 까불고, 양심 없고, 부끄럼을 모르고,
흥분하고, 흐리멍텅하고, 믿지 않고, 게으르고, - 부주의하고, 잊어버리고, 어수선하고, 바로 알지 못하고,
뉘우치고, 졸립고, 넓게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52] 이며; 마지막 넷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둘씩 (묶여) 이중의 뜻이 있다.[53] - 다섯 인식은 뿌리 인식[54] 에 기대어 머무르며, 조건에 따라;
함께 또 홀로 나타나니; 물결이 물에 기대는 것과 같다. - 뜻 인식[55] 은 늘 나타나지만, 생각을 버린 세상[56] 에 태어나거나;
잠과 기절 같은 마음없음[57] 의 두 상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 인식이 굴러 변한다고 나누어 가르는 것도 나누고 가르는 것의 대상이며;
이도 저도 모두 없기 때문에, 모두가 다 오직 인식일 뿐이다. - 인식이 모든 것의 씨가 되어, 이렇게 저렇게 바뀌며;
서로 영향을 준 결과,[58] 이리 저리 나누어 가르는 것이 생긴다. - 여러 업이 남긴 자국[59] 과, 둘[60] 에 매달렸던[61] 자국 때문에;
앞의 ‘다르게 익는 것’[62] 이 이미 다한 뒤에도, 또 다른 ‘다르게 익는 것’이 거듭 나타난다. - 이리 저리 두루 헤아리기[63] 때문에, 이런 저런 것들이 두루 헤아려지지만;[64]
그 두루 헤아림이 붙잡고 있는 것[65] 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66] -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나누어 가르는 것[67] 을 조건으로 하여 생기며;
‘온전히 참을 이루는 것’은 이런 점[68] 에서,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늘 멀리 떨어져 있다. - 따라서 이것[69] 은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과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늘 머물지 않음’[70] 같은 것들처럼,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저것도 (보이지) 않는다.[71] - 이러한 ‘세 가지의 본질적 성질’[72] 에 의지해서, 저러한 ‘세 가지의 본질적 성질이 없음’[73] 을 세웠기 때문에;
부처님은 깊은 뜻[74] 으로 말씀하시길, 그 어떤 경우에도[75] 본질적 성질은 없다고 하셨다. - 첫 번째[76] 는 그 모습에 본질적 성질이 없고,[77] 두 번째[78] 는 (독립적인) 스스로의 본질적 성질이 없으며;[79]
세 번째[80] 는 앞서 이야기한 ‘나와 법에 집착함’이 없는 성질이니; - 이것은 여러 법의 가장 뛰어난 이치이고,[81] 있는 그대로의 참이다;
언제나 그러하기 때문에, ‘오로지 인식’일 뿐이다.[82] - 인식이 ‘오로지 인식’에 머물지 않는 한;
둘에 집착[83] 하는 번뇌는 굴복시켜 없앨 수 없으며; - 눈앞에 작은 물건을 두고, 이를 ‘오로지 인식일 뿐’이라 한다 해도;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참으로 오로지 인식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 (인식의) 조건(이 되는 외부)의 대상과 접하고도 얻는 것이 없을 때;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두 겹 붙듦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인식에 머무는 것이다. - 얻는 것도 없고, 생각을 품지도 않아, 세상을 벗어난 지혜이니;
못나고 무거운 두 가지를 버림으로서, 의지하던 것이 바뀜을 곧 깨달아 얻는다. - 이것은 물 샐 틈 없는 세계이고, 좋고도 늘 그러함이 생각의 한계를 넘으며;
즐거운 자유의 몸이고, 가장 어진 이의 이름난 법이다.
번역 기초 저작물[편집]
산스크리트어 원문[편집]
유식삼십송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안혜(安慧, Sthiramati)의 유식삼십송석(唯識三十頌釋) 산스크리트어 원문에 함께 포함된 게송 부분이다. Sylvain Lévi가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간한 ‘Vijnaptimatratasiddhi: Deux traite de Vasubandu, Vimsatika et Trimsika’에 공개한 것을 따랐다.[84]
त्रिंशिकाविज्ञप्तिकारिकाः
आत्मधर्मोपचारो हि विविधो यः प्रवर्तते ।
विज्ञानपरिणामो ऽसौ परिणामः स च त्रिधा ॥ १ ॥
विपाको मननाख्यश्च विज्ञप्तिर्विषयस्य च ।
तत्रालयाख्यं विज्ञानं विपाकः सर्वबीजकम् ॥ २ ॥
असंविदितकोपादिस्थानविज्ञप्तिकं च तत् ।
सदा स्पर्शमनस्कारवित्संज्ञाचेतनान्वितम् ॥ ३ ॥
उपेक्षा वेदना तत्रानिवृत्ताव्याकृतं च तत् ।
तथा स्पर्शादयस्तच्च वर्तते स्रोतसौघवत् ॥ ४ ॥
तस्य व्यावृत्तिरर्हत्वे तदाश्रित्य प्रवर्तते ।
तदालम्बं मनोनाम विज्ञानं मननात्मकम् ॥ ५ ॥
क्लेशैश्चतुर्भिः सहितं निवृताव्याकृतैः सदा ।
आत्मदृष्ट्यात्ममोहात्ममानात्मस्नेहसंज्ञितैः॥ ६ ॥
यत्रजस्तन्मयैरन्यैः स्पर्शाद्यैश्चार्हतो न तत् ।
न निरोधसमापत्तौ मार्गे लोकोत्तरे न च ॥ ७ ॥
द्वितीयः परिणामो ऽयं तृतीयः षङ्विधस्य या ।
विषयस्योपलब्धिः सा कुशलाकुशलाद्वया ॥ ८ ॥
सर्वत्रगैर्विनियतैः कुशलैश्चैतसैरसौ ।
संप्रयुक्ता तथा क्लेशैरुपक्लेशैस्त्रिवेदना ॥ ९ ॥
आद्याः स्पर्शादयश्छन्दाधिमोक्षस्मृतयः सह ।
समाधिधीभ्यां नियताः श्रद्धाथ ह्रीरपत्रपा ॥ १० ॥
अलोभादि त्रयं वीर्यं प्रश्रब्धिः साप्रमादिका ।
अहिंसा कुशलाः क्लेशा रागप्रतिघमूढयः॥ ११ ॥
मानदृग्विचिकित्साश्च क्रोधोपनहने पुनः ।
म्रक्षः प्रदाश इर्ष्याथ मात्सर्यं सह मायया ॥ १२ ॥
शाठ्यं मदो ऽविहिंसा ह्रीरत्रपा स्त्यानमुद्धवः ।
आश्रद्ध्यमथ कौशीद्यं प्रमादो मुषिता स्मृतिः ॥ १३ ॥
विक्षेपो ऽसंप्रजन्यं च कौकृत्यं मिद्धमेव च ।
वितर्कश्च विचारश्चेत्युपक्लेशा द्वये द्विधा ॥ १४ ॥
पञ्चानां मूलविज्ञाने यथाप्रत्ययमुद्भवः ।
विज्ञानानां सह न वा तरङ्गाणां यथा जले ॥ १५ ॥
मनोविज्ञानसंभूतिः सर्वदासंज्ञिकादृते ।
समापत्तिद्वयान्मिद्धान्मूर्छनादप्यचित्तकात् ॥ १६ ॥
विज्ञानपरिणामो ऽयं विकल्पो यद्विकल्प्यते ।
तेन तन्नास्ति तेनेदं सर्वं विज्ञप्तिमात्रकम् ॥ १७ ॥
सर्वबीजं हि विज्ञानं परिणामस्तथा तथा ।
यात्यन्योन्यवशाद् येन विकल्पः स स जायते ॥ १८ ॥
कर्मणो वासना ग्राहद्वयवासनया सह ।
क्षीणे पूर्वविपाके ऽन्यद्विपाकं जनयन्ति तत् ॥ १९ ॥
येन येन विकल्पेन यद्यद् वस्तु विकल्प्यते ।
परिकल्पित एवासौ स्वभावो न स विद्यते ॥ २० ॥
परतन्त्रस्वभावस्तु विकल्पः प्रत्ययोद्भवः ।
निष्पन्नस्तस्य पूर्वेण सदा रहितता तु या ॥ २१ ॥
अत एव स नैवान्यो नानन्यः परतन्त्रतः ।
अनित्यतादिवद् वाच्यो नादृष्टे ऽस्मिन् स दृश्यते ॥ २२ ॥
त्रिविधस्य स्वभावस्य त्रिविधां निःस्वभावताम् ।
संधाय सर्वधर्माणां देशिता निःस्वभावता ॥ २३ ॥
प्रथमो लक्षणेनैव निःस्वभावो ऽपरः पुनः ।
न स्वयं भाव एतस्येत्यपरा निः स्वभावता ॥ २४ ॥
धर्माणां परमार्थश्च स यतस्तथतापि सः ।
सर्वकालं तथाभावात् सैव विज्ञप्तिमात्रता ॥ २५॥
यावद्विज्ञप्तिमात्रत्वे विज्ञानं नावतिष्ठते ।
ग्राहद्वयस्यानुशयस्तावन्न विनिवर्तते ॥ २६ ॥
विज्ञप्तिमात्रमेवेदमित्यपि ह्युपलम्भतः ।
स्थापयन्नग्रतः किंचित् तन्मात्रे नावतिष्ठते ॥ २७ ॥
यदालम्बनं विज्ञानं नैवोपलभते तदा ।
स्थितं विज्ञानमात्रत्वे ग्राह्याभावे तदग्रहात् ॥ २८ ॥
अचित्तो ऽनुपलम्भो ऽसौ ज्ञानं लोकोत्तरं च तत् ।
आश्रयस्य परावृत्तिर्द्विधा दौष्ठुल्यहानितः ॥ २९ ॥
स एवानास्रवो धातुरचिन्त्यः कुशलो ध्रुवः ।
सुखो विमुक्तिकायो ऽसौ धर्माख्यो ऽयं महामुनेः॥ ३० ॥
त्रिंशिकाविज्ञप्तिकारिकाः समाप्ताः
कृतिरियमाचार्यवसुबन्धोः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라틴어 음차[편집]
- 출처: Sastra section, text no. 18; Digital Sanskrit Buddhist Canon Project of Nagarjuna Institute[85]
Atha Triṃśikāvijñaptikārikāḥ
ātmadharmopacāro hi vividho yaḥ pravartate |
vijñānapariṇāme 'sau pariṇāmaḥ sa ca tridhā || 1 ||
vipāko mananākhyaśca vijñaptirviṣayasya ca |
tatrālayākhyaṃ vijñānaṃ vipākaḥ sarvabījakam || 2 ||
asaṃviditakopādisthānavijñaptikaṃ ca tat |
sadā sparśamanaskāravitsañjñācetanānvitam || 3 ||
upekṣā vedanā tatrānivṛtāvyākṛtaṃ ca tat |
tathā sparśādayastacca vartate srotasaughavat || 4 ||
tasya vyāvṛtirarhatve tadāśritya pravartate |
tadālambaṃ manonāma vijñānaṃ mananātmakam || 5 ||
kleśaiścaturbhiḥ sahitaṃ nivṛtāvyākṛtaiḥ sadā |
ātmaduṣṭyātmamohātmamānātmasnehasañjñitaiḥ || 6 ||
yatrajastanmayairanyaiḥ sparśādyaiścārhato na tat |
na nirodhasamāpattau mārge lokottare na ca || 7 ||
dvitīyaḥ pariṇāmo 'yaṃ tṛtīyaḥ ṣaḍvidhasya yā |
viṣayasyopalabdhiḥ sā kuśalākuśalādvayā || 8 ||
sarvatragairviniyataiḥ kuśalaiścaitasairasau |
samprayuktā tathā kleśairūpakleśaistrivedanā || 9 ||
ādyāḥ sparśādayaśchandādhimokṣasmṛtayaḥ saha |
samādhidhībhyāṃ niyatāḥ śraddhātha hrirapatrapā || 10 ||
alobhādi trayaṃ vīryaṃ praśrabdhiḥ sāpramādikā |
ahiṃsā kuśalāḥ kleśā rāgapratighamūḍhayaḥ || 11 ||
mānadṛgvicikitsāśca krodhopanahane punaḥ |
mrakṣaḥ pradāśa īrṣyārtha mātsaryaṃ saha māyayā || 12 ||
śāṭhyaṃ mado 'vihiṃsāhrīratrapā styānamuddhavaḥ |
āśraddhamatha kausīdyaṃ pramādo muṣitā smṛtiḥ || 13 ||
vikṣepo 'samprajanyaṃ ca kaukṛtyaṃ middhameva ca |
vitarkaśca vicāraścetyupakleśā dvaye dvidhā || 14 ||
pañcānāṃ mūlavijñāne yathāpratyayamudbhavaḥ |
vijñānānāṃ saha na vā taraṅgāṇāṃ yathā jale || 15 ||
manovijñānasambhūtiḥ sarvadāsañjñikādṛte |
samāpattidvayānmiddhānmūrchanādapyacittakāt || 16 ||
vijñānapariṇāmo 'yaṃ vikalpo yadvikalpyate |
tena tannāsti tenedaṃ sarvaṃ vijñaptimātrakam || 17 ||
sarvabījaṃ hi vijñānaṃ pariṇāmastathā tathā |
yātyanyonyavaśād yena vikalpaḥ sa sa jāyate || 18 ||
karmaṇo vāsanā grāhadvayavāsanayā saha |
kṣīṇe pūrvavipāke 'nyadvipākaṃ janayanti tat || 19 ||
yena yena vikalpena yadyad vastu vikalpyate |
parikalpita evāsau svabhāvo na sa vidyate || 20 ||
paratantrasvabhāvastu vikalpaḥ pratyayodbhavaḥ |
niṣpannastasya pūrveṇa sadā rahitatā tu yā || 21 ||
ata eva sa naivānyo nānanyaḥ paratantrataḥ |
anityatādivad vācyo nādṛṣṭe 'smin sa dṛśyate || 22 ||
trividhasya svabhāvasya trividhāṃ niḥsvabhāvatām |
sandhāya sarvadharmāṇāṃ deśitā niḥsvabhāvatā || 23 ||
prathamo lakṣaṇenaiva niḥsvabhāvo 'paraḥ punaḥ |
na svayambhāva etasyetyaparā niḥsvabhāvatā || 24 ||
dharmāṇāṃ paramārthaśca sa yatastathatāpi saḥ |
sarvakālaṃ tathābhāvāt saiva vijñaptimātratā || 25 ||
yāvadvijñaptimātratve vijñānaṃ nāvatiṣṭhati |
grāhadvayasyānuśayastāvanna vinivartate || 26 ||
vijñaptimātramevedamityapi hayupalambhataḥ |
sthāpayannagrataḥ kiñcit tanmātre nāvatiṣṭhate || 27 ||
yadālambanaṃ vijñānaṃ naivopalabhate tadā |
sthitaṃ vijñānamātratve grāhyābhāve tadagrahāt || 28 ||
acitto 'nupalambho 'sau jñānaṃ lokottaraṃ ca tat |
āśrayasya parāvṛttirdvidhā dauṣṭhulyahānitaḥ || 29 ||
sa evānasravo dhāturacintyaḥ kuśalo dhruvaḥ |
sukho vimuktikāyo 'sau dharmākhyo 'yaṃ mahāmuneḥ || 30 ||
triṃśikāvijñaptikārikāḥ samāptāḥ
kṛtiriyamācāryavasubandhoḥ
한역[편집]
한역 본문은 현장(玄奘)의 한역이며, 반야문해(般若文海)의 唯識三十頌講記 를 따랐다.
唯識三十頌
世親菩薩造
大唐三藏法師玄奘奉詔譯
-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依彼轉緣彼 思量為性相
- 四煩惱常俱 謂我癡我見 並我慢我愛 及餘觸等俱
-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為性相 善不善俱非
-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 善謂信慚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 煩惱謂貪瞋 癡慢疑惡見 隨煩惱謂忿 恨覆惱嫉慳
- 誑諂與害憍 無慚及無愧 掉舉與昏沈 不信並懈怠
-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波濤依水
-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絕
-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既盡 復生餘異熟
-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 即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 初即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 此諸法勝義 亦即是真如 常如其性故 即唯識實性
-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 此即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 ↑ 영어로는 ‘The Thirty Verses on Consciousness-only’다.
- ↑ 바수반두가 지은 서른 개의 게송에서는 나오지 않는 용어로 삼십송의 내용을 요약 또는 설명하는 부분이 게송의 중간중간에 뒤섞여 존재하며, 또한 게송의 구조에 대한 설명과 함께 게송의 서술 구조 역시 재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바수반두의 저작 부분과 현장의 저작 부분을 나누어 읽어야 한다. 단, 현장이 남긴 유식삼십론송의 본문에서 현장 스스로는 유식삼십론송의 저자를 바수반두로 명시해 두었다.
- ↑ ātmadharmo, 我法
- ↑ upacāraḥ, 說. 현장은 upacāraḥ를 假說로 한역했다. upacāraḥ를 한역할 때 그냥 說로 충분하며 說 앞에 假를 덧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현장이 假說로 한역한 것은 說의 의미 자체에 포함된 假의 뜻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 글자를 덧붙였거나, 게송의 운율 형식에 좀 더 잘 맞는 대안을 찾아 이렇게 한역한 것으로 보인다.
- ↑ ’나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부분은 좀 더 쉽게 읽힐 수 있도록 한국어 번역에서 새로 넣었다.
- ↑ 한역의 첫번 째 게송 중 두번 째 구에 있는 種相轉은 산스크리트어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산스크리트어의 본 뜻을 살려, 한역에서 덧붙여진 種相轉 부분은 번역하지 않고 생략했다.
- ↑ 첫번 째 게송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게송의 운율 형식(오언절구)에 구애 받지 않고 한역하면 다음과 같다: 我法說有種 彼依識所變 此變三.
- ↑ = vipāko. ‘무르익다, 여물게하다, 결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장의 한역에서는 vipāko를 해석할 때 간단히 ‘熟’으로 하지 않고, ‘다르다’는 뜻의 글자 ‘異’를 덧붙여서 ‘異熟’으로 번역해 두었다. 異熟으로 번역한 까닭을 추정해 보면, 오언절구의 운율 형식에 맞추려는 의도와, 알라야식이 익을 때 다르게 익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목적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식삼십송 산스크리트어 전문에서 vipāko가 몇차례 더 나오지만, 모두 ‘무르익다’의 간명한 표현만 나올 뿐, 명시적으로 ‘다르게’ 익는다는 표현은 없다. 또한, 진제의 전식론에서 알라야식의 설명 부분에 果報識, 本識, 宅識, 藏識 등 다양한 표현이 나오지만, ‘다르다’는 뜻의 ‘異’를 덧붙인 표현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뜻을 살렸다.
- ↑ = vijñaptir viṣayasya, 了別境.
- ↑ = tatra. ‘이 중에서, 여기서, 이 경우에, 따라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장의 한역에서는 ‘初’ 한글자로 번역하였다. 이 ‘初’의 의미는, ‘앞 구절에서 언급한 세가지 인식 가운데에서 첫번째로 언급한...’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다.
- ↑ = ālaya. ‘머물다, 집’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장과 진제 모두 이 산스크리트어 표현의 음차어를 번역문 본문에 남겨 두었다. 현장은 유식삼십론송에서 阿賴耶로, 진제는 전식론에서 阿梨耶로 각각 음차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따라 ‘알라야’로 음차하였고, 단어의 발음(음차) 보다는 그 뜻을 살려 ‘인식의 집’으로 번역했다.
- ↑ = sarva. ‘모든, 언제나, 늘’ 등의 뜻. 현장의 ‘모든’의 뜻으로 ‘一切’로 한역하였다. 그러나 꼭 ‘모든’ 말고도 ‘언제나, 늘’로 해석하더라도 뜻은 통한다. 즉, ‘모든 씨앗을 여물게 한다.’ 말고도 ‘언제나 씨앗을 여물게 한다.’로 해석할 수 있다.
- ↑ = vijnapti, 了.
- ↑ = upadi, 執受.
- ↑ = sthāna, 處.
- ↑ = asaṃviditako
- ↑ asaṃviditako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비슷한 견해를 가진 반면, opādisthānavijñaptikaṃ에 대한 해석은 관점에 따라 매우 다른 방식의 해석을 볼 수 있다. 멜라니 잔슨-막슬리의 경우, ‘unperceived instruction of conception’으로, 현장의 한역과는 매우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해석의 이유는, 현장의 경우 opādisthāna 부분을 upādi(執受)와 sthāna(處)로 나누어 해석했고, 잔슨-막슬리의 경우엔 하나의 개념인 ‘upadiṣṭa’ 즉 ‘specified, particularized; taught, instructed (구체적인, 특정한; 배운, 교육된)’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두 해석을 큰 틀에서 다음과 같이 접근할 경우 접합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인식(了)의 과정에서, (인식 대상을 거두고,) 거두어 붙잡은 것(執受)이 (어디에, 어떻게) 머무는 지(處)는 지각되지 않(알 수 없)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 ↑ = sparśa, 觸. ‘닿다, 건드리다, 이르다’ 등의 뜻. 여기서는 인식의 과정에서 대상에 닿는 것/순간을 뜻한다.
- ↑ = manaskāra, 作意.
- ↑ = vid, 受.
- ↑ = saṁjñā, 想.
- ↑ = cetanā, 思.
- ↑ 감각 기관이 인식의 대상과 닿고 (= 닿아), 그 닿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 뜻을 일으키고), 대상에 대한 정보를 거두어 (= 거두어), 마음 속에 대상을 떠올리고 (= 떠올리고), 떠올린 대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할지 등을 생각하는 것 (= 헤아리기)
- ↑ 便行, 또는 五便行이라고도 부른다. 늘 되풀이 되는 인식의 과정이라는 뜻에서 ‘편행’이라고 부르며, 늘 함께하는 것이 다섯 가지라는 점에서 ‘오편행’이라고도 부른다. 유식삼십송의 본문 뒷부분에서는 ‘촉을 시작으로 하는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촉등’으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 ↑ = upekṣā, 受. 다섯 쌓임(五蘊) 즉 색, 수, 상, 행, 식 (色受想行識) 가운데에서 두번째인 수(受)를 지칭한다. ‘좋다’, ‘싫다’처럼 대상에 대한 즉각적 반응으로서의 ‘느낌’의 뜻.
- ↑ = vedanā, 捨. ‘관련 없다, 차별 않다, 버리다, 내려놓다’ 등의 뜻.
- ↑ = upekṣā vedanā. 이 부분에서 현장은 한역은 산스크리트어 원고와 비교할 때, 두가지 다른 점이 있다. 첫번째, ‘捨受’의 앞 부분에 산스크리트어 원고에는 없는 ‘相應唯’라는 문구를 새로 넣어서, 捨受가 아니라 相應唯捨受로 늘려서 번역하였다. 두번째, 구절의 위치 측면에서, 산스크리트어 원고에서 이 부분은 네번째 게송의 맨 앞에 있지만, 현장의 한역에서는 세번째 게송의 맨 뒷부분으로 차이가 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뜻과 위치를 기준으로 삼았다.
- ↑ anivṛtā. 현장의 한역에서는 無覆. 번뇌에 덮이지 않음을 뜻한다.
- ↑ akhyākṛtaṃ. 현장의 한역에서는 無記. 원인이 조건을 만난 결과를 세 가지 즉, 선, 악, 선도 악도 아닌 것으로 나누며, 무기는 이 가운데 ‘선도 악도 아닌 것’을 뜻한다.
- ↑ sparśādayas. 현장의 한역에서는 觸等. ’닿아’부터 ‘헤아리는 것’까지의 다섯을 가리킨다.
- ↑ vartate srotasaughavat. 현장의 한역에서 如瀑流 부분이다. vartate는 ‘~와 같다”의 뜻이며, srotasaughavat는 ‘사나운 물줄기’를 뜻한다.
- ↑ 인식의 과정에서 닿고... 헤아리는 것까지의 다섯이 늘 단번에 일어남을 뜻한다.
- ↑ 현장의 한역 가운데 4게송의 마지막 부분인 阿羅漢位捨 구절은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는 5게송의 맨 앞 부분으로 되어 있다. 阿羅漢位捨 구절을 4게송에 포함시킬 경우, 4게송으로 알라야식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원문의 끊는 점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문헌의 끊는 점을 살렸다.
- ↑ = tasya. 앞의 4게송 마지막에 언급된 사나운 물줄기와 연결된다.
- ↑ = vyāvṛtir, 捨. 현장의 한역에서는 ‘아라한의 자리에서 버린다’로 해두었지만, 산스크리트어 게송은 ‘벗어나니 아라한의 자리다’로 되어있다. 같은 뜻을 서로 다른 언어 구조적 한계와 노래라는 형태적 틀의 한계 때문에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 = arhatve, 阿羅漢位.
- ↑ = tad āśritya pravartate. 현장의 한역 중 5게송의 세번째 구절인 依彼轉緣彼에서 依, 彼, 緣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현장의 해석처럼 이 부분은 제2식 마나식의 특성을 설명하는 문구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Melanie Johnson-Moxley의 견해(참고 문헌 중 Johnson-Moxley의 박사 논문인 Vasubandhu’S Consciousness Trilogy, 224페이지)처럼 제1식 알라야식의 특성을 설명하는 문구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인과율(pravartate, 만들어짐)이 쉬는 곳(āśritya, 안식처)’.
- ↑ = manonāma. 산스크리트어 문헌의 라틴어 음차자는 mana(s), 즉 우리말로 ‘마나’라고 해야 한다. 현장이 한자로 번역할 당시인 7세기 경, 당대 중국인들의 ‘末’ 발음은 ‘말’ 이외에 ‘마’의 발음도 있었거나, ‘말’과 ‘마’ 양쪽으로 발음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여기서는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따라 ‘마나’로 표기했다.
- ↑ = mananātmakam
- ↑ 현장의 한역에서는 제1식, 제2식, 제3식이라고 각각의 인식에 순서를 붙이고 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는 이런 문구가 나오지 않는다.
- ↑ nirodhasamāpattau
- ↑ 요별경식에서의 경(境)은 ‘(개별 감각 측면의) 세계/대상’의 뜻이며, 마음 자리의 설명에서 나오는 별경에서의 경은 ‘경우’를 뜻한다.
- ↑ 바수반두의 대승오온론(고려대장경 대승오온론, K0618V17P0637b05L - K0618V17P0637b07L: 云何受薀? 謂三領納: 一苦,二樂,三不苦不樂. 樂謂滅時有和合欲, 苦謂生時有乖離欲, 不苦不樂謂無二欲.)에 따르면, 三受는 삼수온(三受薀)이다. 수(受)를 ‘느낌’ 또는 ‘(마음의) 거둠’이라고 번역할 경우, 삼수는 결국, ‘느낌의 결과값 세 가지’ 또는 ‘거둠의 결과값 세 가지’의 의미가 된다. 예를 들어서, 차가움이라고 하는 온도를 몸으로 느낄 때, 한여름에 더위를 느끼고 있던 몸에게 차가움은 ‘락’이 되겠지만, 한겨울에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면 차가움은 오히려 ‘고’가 된다. 느낌 자체는 차가움이며, 현재의 상태에 따른 느낌의 결과가 고 또는 락 등이 되는 식이다.
- ↑ 한역과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글의 전개 순서가 같지 않아, 한국어 번역은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전개 방식을 따랐다. 즉, 한역 중 不定(心所)는 산스크리트어 원문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에서도 넣지 않았다.
- ↑ 다른 번역 = ‘집중하고’
- ↑ 세 가지 뿌리는 탐내지 않음, 미워하지 않음, 어리석지 않음이며, 바수반두의 대승오온론에 설명되어 있다. (고려대장경 대승오온론 중 K0618V17P0637b13L - K0618V17P0637b14L: 無貪善根, 無瞋善根, 無癡善根)
- ↑ 산스크리트어 원문에는 ‘行捨’가 나오지 않으므로 한국어 번역에서 제외하였다.
- ↑ 산스크리트어 원문에서는 11송이 여기에서 끝난다.
- ↑ 산스크리트어 원문에서는 疑와 惡見의 순서가 한역과 반대다.
- ↑ 산스크리트어 원문의 12송의 마지막에 나오는 māyayā 이며, 한역 13송의 첫머리에서 誑으로 나온다.
- ↑ śāṭhyaṃ, 諂
- ↑ 진제의 전식론에서는 尋은 覺으로, 伺는 觀으로 한역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 원문과 티벳어 번역을 기초로 서구권에서 번역한 글들에서는 번역자마다 이 두 개념을 각자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 ↑ 산스크리트어 원문에서는 悔眠尋伺 넷을 모두 수번뇌에 포함시키되, 不定심소가 따로 있다는 표현은 없다. 14송의 마지막 문구인 ‘dvaye dvividhā’만이 현장의 한역 중 ‘二各二’와 어울린다. 진제는 전식론에서 ‘dvaye dvividhā’ 부분을 ‘此小惑中有二種: 一作意遍行, 二不遍行.’으로 한역하였다. 서구권의 번역자들도 이 문구에 대한 전반적으로 통일된 의견은 없으며, 번역자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보이고 있다. 즉, Anacker(2005)는 “the last two pairs are of two kinds”; Radhakrishnan & Moore(1957)는 “the former two composing a difference class from the latter”; Kalupahana(1987)는 “the last two being twofold [defiled and non-defiled]”; Kochumuttom(1982)는 “The latter two couples [namely Remorse and sleepiness, reasoning and deliberation] Can be of two kinds, [namely defiled and undefiled].”; Lusthaus(2002)는 “two pairs in two ways”; Wood(1991)는 “Remorse, sleepiness, reasoning and analysis, which are of two kinds, are also secondary defilements.” 현장의 한역에서 悔眠尋伺 네 가지를 따로 한역하였음을 고려해서 二各二의 한국어 번역과 연결하였다.
- ↑ mūlavijñāne, 근본식(根本識). 뿌리 인식을 제8식인 알라야식으로 보는 것이 가장 널리 퍼진 해석 방식이지만, Kalupahana(1987, 201p)는 뿌리 인식을 제6식인 의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즉, “(제6식은) 나머지 5식의 조정자이기 때문에 근본식과 mano-vijñāna이라고 불리며, mūla-vijñāna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에 주목. (... because it is the co-ordinator of the other five senses it can be rightly called the foundational sense, and mano-vijñāna then synonymous with mūla-vijñāna.)
- ↑ manovijñāna, 제6식인 의식(意識)
- ↑ asaṁjñikād, 무상천(無想天)
- ↑ acittakāt, 무심(無心)
- ↑ anyonya vaśād, 展轉力
- ↑ vāsanā, 習氣. 무의식(개인적 무의식과 사회적 무의식)과 유전자(단일 세대를 넘어서 세대와 세대에 걸쳐 전해지는 생물학적 기억)에 남겨진 자국
- ↑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나누어 가르는 것.
- ↑ 집착하던
- ↑ 알라야식
- ↑ vikalpena, 遍計
- ↑ vikalpyate. vikalpanā의 수동적 형태. 즉, 직접 한역한다면 所遍計가 된다.
- ↑ vidyate, 所執. 두루 헤아림이 집착하는 대상 즉, 두루 헤아림의 결과로서 인식된 대상
- ↑ 한자에 토씨만 한국어를 붙인 한국어 번역 문헌에서 ‘遍計所執性’이나 ‘遍計所執自性’이라고 이름 붙이는, ‘세 가지 본질적 성질’ 중 첫번째 성질인 ‘두루 헤아림이 붙잡고 있는 것의 본질적 성질’과 그 본질적 성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본질적 성질 없음’의 첫번째 내용에 대한 설명 부분. 즉, 인식(=두루 헤아림)된 대상(붙들고 있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인식자의 세 인식이 서로 영향을 끼친 결과로 ‘만들어진’ 相(인식)이라는 점에서, 대상 자체도 아닐 뿐더러 인식된 상태 그대로의 대상이라는 것도 허구이기 때문에, 자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 ↑ vikalpaḥ, 分別
- ↑ 나누어 가르지 않는다는 점
- ↑ 온전히 참을 이루는 것
- ↑ anitya, 無常.
- ↑ 常을 본 후에 無常이 보이듯,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온전히 참을 이루는 것도 보이지 않음을 뜻한다.
- ↑ trividhasya svabhāvasya, 三(自)性
- ↑ trividhāṃ niḥsvabhāvatām, 三無(自)性
- ↑ 密意
- ↑ sarvadharmāṇāṃ, 一切法
- ↑ ‘세 가지의 본질적 성질’ 중 첫 번째. ‘두루 헤아림이 붙잡은 것’의 본질적 성질
- ↑ lakṣaṇenaiva niḥsvabhāvo, 相無(自)性
- ↑ ‘세 가지의 본질적 성질’ 중 두 번째.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의 본질적 성질
- ↑ 無自然(自)性
- ↑ ‘세 가지의 본질적 성질’ 중 세 번째. ‘온전히 참을 이루는 것’의 본질적 성질
- ↑ paramārthaś, 勝義
- ↑ 25송의 마지막 부분이 saiva vijñaptimātratā, 即唯識으로 끝맺으며, 한역에서 보이는 實性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구절은 없다.
- ↑ grāhadvaya, 二取. 산스크리트어본과 한역본 모두 둘(dvaya, 二)로 표기해 두었으며, ‘둘’이 가르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서, 한국어본에서도 그저 ‘둘’로 번역해 두었다. 그러나 글의 맥락을 살펴보면, ‘둘’이 가르키는 것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 두가지임을 알 수 있다.
- ↑ Tola, F. and C. Dragonetti (2004). p.72
- ↑ Digital Sanskrit Buddhist Canon Project of Nagarjuna Institute Nepal and University of the West, Rosemead, California, USA
참고 문헌[편집]
- Anacker, S. (1984). Seven works of Vasubandhu, the Buddhist psychological doctor, Motilal Banarsidass.
- Conze, E. (1964). Buddhist texts through the ages, Harper & Row.
- Johnson-Moxley, M. K. (2009). Vasubandhu's consciousness trilogy: a yogacara Buddhist process idealism, ProQuest LLC.
- Kalupahana, D. J. (1987). The principles of Buddhist psycholog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 Kochumuttom, T. A. (1982). A Buddhist doctrine of experience: a new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works of Vasubandhu, the Yogācārin, Motilal Banarsidass.
- Lévi, S. (1925). Vijnaptimatratasiddhi: Deux traite de Vasubandu, Vimsatika et Trimsika, Bibliotheque de L'Ecole des Hautes Etudes. ANU AA BL1405. B8
- Lusthaus, D. (2002). Buddhist phenomenology: a philosophical investigation of Yogācāra Buddhism and the Chʼeng Wei-shih lun, RoutledgeCurzon.
- Radhakrishnan, S. and C. A. Moore (1957). A source book in Indian philosophy, Princeton University Press.
- Tola, F. and C. Dragonetti (2004). Being as consciousness: Yogācāra philosophy of Buddhism, Motilal Banarsidass.
- Wood, T. E. (1991). Mind only: a philosophical and doctrinal analysis of the Vijñānavāda, University of Hawaii Press.
- 바수반두({{llang|sa|वसुबन्दु, Vasubandhu, 世親): 오온론 (고려대장경 대승오온론 정자본)
- 파라마르타(산스크리트어: परमार्थ Paramārtha, 진제, 眞諦): 전식론(轉識論), A.D. 557-559, 고려대장경 전식론 정자본
바깥 고리[편집]
- 고려대장경 유식삼십론송 정자본 이미지
- 고려대장경 유식삼십론송 정자본 텍스트
- Sanskrit Resources, Triṁśikā
- 반야문해(般若文海), 唯識三十頌講記
- 中華電子佛典協會, CBETA 漢文大藏經 唯識三十論頌
- A Buddhist Library, Trimsika(Thirty Stanzas)
- Wutai Mountain, Trimsatika (Thirty Verses) of Vasubandhu
- Lapis Lazuli Texts, Trimsika Vijnaptimatrata
- Digital Sanskrit Buddhist Canon Project, Nagarjuna Institute Nepal and University of the West, Rosemead, California, USA; Sastra section, text no.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