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
(만법은) 아(我)와 법(法)을 가설함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서로 변전(變轉):이리저리 변하여 달라짐)하는데,
그것은 의식에 의지해 변전(變轉)되는 것이다.
이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능변(能變)는 오직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아(我)는 내가 아는 ‘나’이고,
법(法)은 ‘나’의 대상들이다.
이 대상에는 나의 사고, 관념, 기억, 희망, 성격 등과 같은 정신적인 작용,
나의 몸 그리고 ‘너’그리고 일체 사물이 포함된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의 대상, 불교는 이런 것이고 기독교는 저런 것이며,
가정은 이러해야하고, 민주주의는 저래야한다는 등의 관념,
나의 학창시절, 사랑, 가정, 부모 형제, 사업 등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희망, 근심, 걱정, 게으르거나 부지런하거나, 온화하거나 급한 성격 등과 같은 정신 작용,
그리고 혈압이 높거나 낮은 등 여러 가지 육체적 건강상태가 관심의 대상이 될 때,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너’나 내가 경험하는 ‘너’가 생길 때 이들이 모두 법(法)이 되어
나인 아(我)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곧 이들이 생김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인 아(我)가 생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법(法)이란 없었고
법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의 상대되는 아(我)도 없는
하나의 그 무엇이 있었다는 원리가 불교의 정설이다.
여기에서 가설아법(假設我法)이라고 한 것은
원래는 아와 법(我法)이 나누어지지 않았는데 나누어졌다고 인식하니 가설(假設)이라 했다.
태중에 있는 아기나 갓 태어난 아기는 자기와 엄마가 하나라고 알고 있다가
의식이 발전되면서 자기와 엄마가 별개라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사춘기에 들어서면 부모와 자기는 완전히 다르다고 인식되어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부모로부터 독립하려고 하게 되고,
장년기가 되면 부모에 대한 인식이 더욱 변하게 되는 것이나
이것은 각자의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뜻으로 가설(假設)이라 한 것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나와 나의 대상이 원래는 둘이 아닌데
너와 내가 별개로 있다고 착각하여 상대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인식한다.
즉 내가 보는 네가 있고, 내가 경험하는 사물이 있으며 내가 아는 나의 주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대상들은 나의 의식에 의해 변해진다.
나의 의식이 너를 좋게 보면 너는 좋은 사람이 되고, 너를 나쁘게 보면 너는 나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위 게송에서 상전(相轉), 서로 변전한다고 한 것은
너의 입장에서 보면 네가 아(我)가 되고 내가 너의 법(法)이 되니,
나는 네가 의식하는 대로 변해진다.
즉 내가 의식하는 네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너의 입장에서는 나는 네가 의식하는 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능변(能變),
나의 상대를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나의 의식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의 의식에 의하면 내가 나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서로 다른 전변(轉變:형세나 국면 따위가 바뀌어 달라짐. ) 에 의해 갑이 을을 무시하기도 하고,
을이 갑을 나쁜 사람이라고 협박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전(相轉)하는 변화는
의식(意識)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법이며,
이러한 변화를 능히 일으킬 수 있는 능변식(能變識)에는 오직 세 가지 뿐이라고 했다.
서양철학에서 보는 아(我)와 법(法)은 어떠한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한
데카르트의 명구는 이원론(二元論)적 사상이고, 이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해 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이 명구의 사상은
생각하는 주체의 생각이 그 존재를 결정짓는다고 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의 대상이 항상 이원화(二元化)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원리 하에서는 주체가 생각하는 대로 객체가 존재하는 이론이므로
주체와 객체가 항상 이분법(二分法)적으로 나누어져
주체는 그의 능력에 따라 항상 주체가 될 수 있고, 객체는 항상 객체가 될 수 있다는 정의를 내리게 되어,
17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남북미, 동양에 식민지 정책을 펴나가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 사상은 또 기독교의 이분법(二分法)적 선교활동의 받침이 되었다고 볼 수 있고,
또 기독교의 이분법적 교리에서 데카르트의 이 사상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좌우간 이 사상은 주체는 객체를 정복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개념을 법칙으로 세워
다른 사람을 잡아 노예로 삼고, 강자(强者)가 약자(弱者)를 취하고, 남의 나라를 정복하고,
타종교를 파멸시키고, 자연을 정복하여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상적인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에서
아법상전(我法相轉)은위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해당되는 명구이다.
나에게 어떤 경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아(我)와 법(法)이 동시에 일어나야 경험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경험이란 생각이니 생각이란 나와 네가 만날 때 시작된다.
아(我)와 법(法)이 만나기 전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나와 네가 만날 때 작용을 시작하여 자기 의사를 들어내는 법이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기 위해서는 혹은 생각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와 객체가 만나야 됨을 말한다.
내가 없는 네가 존재할 수 없고,
네가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상전(相轉)이다.
그리고 네가 아(我)가 될 때는 내가 너의 법(法)이 된다는 상전(相轉)의 개념,
상대성(相對性)이 성립하게 되어 있어 상호보완적이고 협력적이 되어야 한다는 불교의 연기론이 성립되는 바탕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아(我)와 법(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서로 변전한다.”는
두 명구는 서양역사와 동양역사의 발전을 완전히 상반(相反)되게 만든 철학의 근원으로써
너무나도 대조적인 의미를 가진 명구임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알아도
불교의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이,
혹은 아법상전(我法相轉)이 이에 비교되는 불교의 존재론의 명구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보는 아(我)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주재자(主宰者)로서의 ‘나’이다.
모든 것을 관장하고 결정하고 행하는 주재자로의 ‘나’에는 피(被)주재자로서의 ‘나’도 있다는 것이
아법상전(我法相轉)의 의미이다.
이 ‘나’는
시간과 장소 대상에 따라 주(主)가 되기도 하고
객(客)이 되기도 하고,
능(能)이 되기도 하고
소(所)가 되기도 하며,
인(因)이 되기도 하고
연(緣)이 되기도 하며,
주는 자가 되기도 하고 받는 자가 되기도 하며,
말을 하는 자가 되기도 하고 듣는 자가 되기도 하는 ‘나’이다.
2)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자로서의 ‘나’이다.
나고 죽음이 없는 영생(永生)하는 ‘나’에는
또 나고 죽음이 있는 ‘나’도 있다.
나고 죽음이 있는 ‘내’안에
나고 죽음이 없는 그 무엇이 있어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이 몸의 생(生)과 멸(滅), 즉 윤회(輪回)를 주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시방세계를 먹음은 자로서의 ‘나’이다.
공(空)이 된 ‘나’, 적멸이 된, 혹은 열반에 오른 ‘나’는 시방법계와 하나가 된 ‘나’인 동시에
시방법계의 한 미진(微塵)으로서의 ‘나’이기도하고
과거, 현재, 미래가 내 한 생각 순간 속에 있기도 하고
한 찰나 앞을 볼 수 없는 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전체로서의 ‘나’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나’가 있다.
전체로서의 ‘나’는 능(能)이 되고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소(所)가 된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유가설아법(由假說我法) 유종종상전(有種種相轉)
아(我)와 법(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서로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전한다.”는 여러 가지 모습은
‘나’자신이 ‘너’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되고 싶지만
‘너’도 나를 완전히 제압하여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자 할 것이니
대립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더욱이 내가 너로부터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받거나,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지만,
상전(相轉)하여
네가 나로부터 그러한 경험을 당할 수도 있으니
자연히 ‘나’와 ‘너’의 관계는 복잡 미묘한 일들로 서로가 변전하는 것이니,
네가 잘됨으로서 내가 잘 될 수도 있고, 내가 잘됨으로서 네가 잘될 수 있는 관계에 있다는 의미도 있다.
피의식소변(彼依識所變) 차능변유삼(此能變唯三)
‘나’와 ‘너’의 관계가 복잡 미묘한 일들로 변전되는 것은 의식(意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즉 변전을 시키는 주체는 의식이다.
此能變唯三 이렇게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의식에는 오직 세 가지 뿐이다.
[다시 제 1 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
원래는 ‘너’와 ‘나’의 분별이 없었는데,
너와 나의 과거세에 지은 업식(業識)에 의해 나와 너는 아(我)와 법(法)으로 나뉘어 지게 되었고,
나누어졌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원하는 것들이 있어
이들이 서로 상충되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이 서로 간에 전변(相轉)하여 일어난다.
이 상전(相轉)은 의식(意識)(마음)에 의해 변전(變轉)되는 바이고, 이 의식에는 오직 세 가지뿐이다.
지난 주에는 아법상전(我法相轉)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구에 비교되는
불교의 존재론이라고 했다.
아(我)와 법(法)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서만이 만법이 생성 존재할 수 있고,
또 상전(相轉)함으로 너와 나의 입장이 서로 바뀔 수도 있고,
또 너와 내가 연(緣)해야 무엇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그리고 연이 다할 때 법(法)도 다하고 상전(相轉)도 다하여 아(我)도 사라지는 이치를 설명했다.
그리고 아(我)와 법(法)이 상전(相轉)한다는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말을 할 때는 네가 있으니까 내가 말을 하는 것이니 아와 법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 때, 내가 아(我)이고, 나의 말의 상대인 네가 법(法)이 된다.
그리고 네가 말을 할 때는 내가 너의 말을 들으니, 내가 법이 되고 네가 아가 되는 것이니
아법상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상관관계가 이러하니
말할 때 상대방에게 바르게 그리고 편안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그 노력이 돌아서 상대방이 나에게 바르게 그리고 편안하게 대하게 되고,
또 그 반대도 성립된다는 뜻으로 아법상전(我法相轉)을 해석하였다.
그리고 아와 법은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일어났을 때,
그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무엇인가 일어난 것이 있으므로 내가 생각하게 되는데,
일어난 것이 법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이다.
즉 법이 일어나니 동시에 내가 있게 되는 것이다.
원효스님께서 간밤에는 잠을 편안히 잤는데
그 다음 날은 뼈와 해골을 보고 그 곳이 무덤인 줄 알았을 때 무엇인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 있었기에 밤이 새도록 귀신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며 밤잠을 설치게 된 것이다.
이 때 그 해골 뼈를 보고 두려움을 느낀 마음이 법이요, 그 두려움을 보는 내 마음이 나이다.
이 경우는 내 마음 안에서 아와 법이 동시에 일어난 것인데,
이 때 아가 그 두렵게 생각되는 법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두려움의 대상인 법과 두렵게 생각하는 아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고,
두려움이 소멸될 수도 있다.
두려움이 소멸될 경우 법이 소멸된 것이고,
법이 소멸되었으므로 해골을 두렵게 생각했던 아도 소멸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법상전이다.
이 때, 아(我)가 주체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므로 능변(能變)이라 하고,
이 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아래 게송에서 설명한다.
참조 : 이 색갈 부분은 편집자가 네이버 국어사전에 가져온 것이므로 본문에는 설명이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