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시무부무기 촉등역여시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항전여폭류 아라한위사
[제8 아뢰야식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촉(觸) 등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움직임(恒轉)이 [마치] 폭류(瀑流)와 같으니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서 사(捨)[무부무기(無覆無記)]가 된다.
시무부무기(是無覆無記)란
아뢰야식의 체(體),
즉 근본 자리는 물들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도 치우침이 없는 자리이다.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니
번뇌가 없고, 선악(善惡)에 치우침이 없다는 말은 좋고 나쁜 것에 집착이 없다는 말이다.
선인(善因)에 집착이 없으니 선과(善果)에도 집착이 없고,
선인(善因)이 없으니 악인(惡因)도 없다.
악인이 없으니 악과(惡果)도 지어지지 않는다.
이는 곧 인과(因果)가 없다는 말이 되고
인과(因果)가 없다는 말은 생(生)하는 것도 없고 멸(滅)하는 것도 없다는 뜻이 되니,
시무부무기(是無覆無記)가 곧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비유로 아뢰야식의 체(體)를 설명하고자 한다.
음식을 담는 접시가 체에 비유된다.
어떠한 음식을 담아도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고,
그로 인해 오염됨도 없으며 선악(善惡)도 없다.
다만 그에 담긴 음식이 오염될 수도 있고,
좋은 음식 혹은 나쁜 음식이 있을 수 있고,
음식을 담았을 때는 생(生)이고, 그에 담긴 음식을 버리고 씻는 것은 멸(滅)인데,
접시 자체는 불생불멸이다.
이러하니 무부무기(無覆無記)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 즉,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의미한다.
공(空)한 자리는 곧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청정무구(淸淨無垢)하다는 말인데,
이 자리가 곧 제8아뢰야식의 체(體)라고 했다.
근본은 무부무기이지만 우리들이 숙세에 지은 업에 의해
우리들의 마음에는 번뇌가 있고 선악이 있으므로
선인(善因) 선과(善果), 악인(惡因) 악과(惡果)의 육도윤회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항상 폭포수가 흐르는 것과 같이 빠르게 전변되어 간다.
그러나 범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체 번뇌와 선악(善惡)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소멸하고 여의었을 때
아라한(阿羅漢)의 계위(階位)에 오르게 된다는 말씀이다.
아라한은 생멸이 있는 제6식과 제7식을 항복받아 청정무구한 제8식에 안주(安住)하게 된다.
이 자리를 반야심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고,
또 이 자리에서 반야바라밀다를 체험하게 된다고 하셨다.
표현은 다르지만 진실은 반야심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다.
촉등역여시(觸等亦如是)는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도 그와 같다고 한 것은
이들의 체(體)도 아뢰야식의 체와 같이 무부무기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작용은 제8식에 저장된 정보에 의지해서 작용하는
제6식이 능변식(能變識)이 되어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작용을 일으키고, 그 동작이 그대로 제8식에 저장되는데
이때 8식은 6식의 작용을 받으므로,
6식의 작용을 받는 8식을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라고 하는데
이 오변행심소도 무부무기(無覆無記)하다고 했다.
이는 8식의 오변행심소도 그 체가 청정무구하다는 뜻이지,
제8식에 번뇌 종자나 선악의 종자가 없다는 말도 아니고 오변행이 무부무기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8식인 오변행의 심소(心所)의 체만이 무부무기로 봐야 한다.
제6식인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오변행의 체는 무부무기이나
그 8식에 저장된 업식에 영향을 받은 상(相)은 유부유기(有覆有記)이다.
번뇌도 있고 선악이 있으며 인과(因果)도 있는 동작이다.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는
반야심경의 오온(五蘊) 중 수상행식(受想行識)에 해당하고
유식30송 첫 구절에 나오는 법(法)은 오온 중 색(色)에 해당한다.
그리고 촉(觸)은 색(色)을 전제로 한다.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공(空)하다는 말과
유식에서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가 무부무기(無覆無記)라고 하는 말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항전여폭유(恒轉如瀑流) :
‘항상 움직임(恒轉)이 [마치] 폭류(瀑流)와 같다’고 한 것은
제6식과 7식이 제8식에 저장된 번뇌와 선악의 씨앗에 의지하여 항상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오행(五行)의 움직임이,
곧 사물이나 마음의 대상을 접촉할 때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해가는 것이
마치 폭포수와 같이 빠르게 흐른다는 말이니, 번뇌로 인한 생멸하는 인과가 빠르게 전개되어간다는 말이다.
아라한위사(阿羅漢位捨)는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서 사(捨)가 된다. 즉 적멸(寂滅), 혹은 무부무기(無覆無記)가 된다.
그러나 아라한의 계위에 오를 때까지는 번뇌의 흐름이 폭류(瀑流)와 같다고 했다.
번뇌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아라한위사(阿羅漢位捨)란 아라한의 계위에서는
아집과 법집을 모두 소멸하여 일체 번뇌의 흐름이 끊어졌음을 뜻한다.
즉 부처, 열반 혹은 극락세계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아라한의 4계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설하셨고 그렇게 집행하셨으며
세존 스스로도 아라한이라 칭하셨음을 유의해야 할 줄 안다.
대승불교 권에서 아라한을 부처님 살아생전에 설하신 것과 다르게 해설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수행정도가 그에까지 미치지 못하니 아라한과 보살을 분별하는 분별심을 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아라한은 아직 법집을 끊지 못하고 소지장을 끊지 못하였다거나,
보살이 아라한보다 상위에 속한다.’ 고 하는 것 등은
불멸(佛滅) 후 약 400~500년경에 대승불교 권에서 주장한 설이라는 것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지난주에 강의한 것을 간단히 복습하여 보자.
제 2송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이숙식(異熟識), 사량식(思量識), 요별경식(了別境識) 삼식(三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고, 처음 이숙식은 아뢰야식, 종자식(種子識), 함장식(含藏識), 심(心), 심소(心所), 심왕(心王), 제8식 등으로 불러
그 성능을 표현한다고 했다.
아뢰야식은 내 몸 안에 있는 일체 장기를 관장하여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유지하게 하며,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일체 업의 종자를 함장하고 있다가 연을 만나면 싹이 터 작용하고,
그 작용한 업을 다시 아뢰야식에 저장하는 과정이 우리들의 생활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죽을 때는 우리들의 육체의 성질이 그대로 제8식에 함장 되고,
사량식과 요별경식도 그대로 제8식에 함장 되어 있다가 죽으면 육체를 이탈하여,
다시 연을 만나 다음 생을 맞게 된다고 했다.
제 3송에서
아뢰야식의 성(性)은 불가지(不可知) 집수(執受), 처(處), 요(了)하고,
불가지 상여(常與)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하고, 불가지 상응(相應) 유사수(唯捨受)라 했다.
제 4송에서 아뢰야식의 체(體)를 성명했다.
아뢰야식의 체는 무부무기(無覆無記)라 하고,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체도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번뇌 선악의 망상은 폭포수와 같이 흐르지만
아라한의 계위에 오르게 되면 일체 번뇌 선악시비가 사라지고
제8 아뢰야식의 근본자리인 무부무기에 돌아가게 된다고 했다.